1.
엄마가 사촌오빠의 딸 결혼식에 가자고 제안하셨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결혼식은 충남에서 진행되었고, 하루 전날 인천 외할머니 댁에서 묵고 다음날 일찍 출발했다.
이번에 결혼하는 엄마의 사촌오빠의 딸의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지만 이에 대해 명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을 간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명절 때마다 외가의 역사에 대해 얼핏 들었지만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인천에서 충남까지 가는 길에 엄마의 사촌오빠, 그리고 그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형은 군대에 갔다가 돌아가셨으며, 부인은 재가하여 아이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셨단다.
그래서 이번에 딸을 결혼시키는 엄마의 사촌오빠는 엄마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엄마의 사촌오빠는 절을 운영하는 스님과 아이를 낳아 아들을 하나 낳았으며,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절에서 일하는 다른 여자분과 아이를 낳은 것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절을 운영하는 스님이 청각장애가 있는 여자분을 사촌오빠분과 맺어줬고, 딸을 낳았으나, 그 여자분의 오빠들이 그 여자분과, 딸을 데려갔다고 한다.
또 다른 여자분과 딸과 아들을 가졌으며, 그 딸이 이번 결혼식의 신부였다.
엄마의 사촌오빠. 그리고 그 분의 자식분들..
외람되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사신 분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내 엄마뿐만이 아닌 엄마도 누군가의 사촌동생, 외할머니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2.
이 결혼식에서 많은 외가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명절 때 보다 더 많은 친척들을 만났다.
재작년쯤 결혼해 아이를 낳은 사촌동생도 100일정도 지난 아이와 함께 왔다.
내게 그 사촌동생에 대한 이미지는 한장의 사진으로 기억된다. 갓난 아기인 사촌동생과 그 아기를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나.
사진 속의 갓난 아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의 외가 친척들과의 기억.. 내가 초등학교때의 외삼촌, 사촌형제들.
어느새 내가 내 기억속의 외삼촌의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이렇게 개인의 역사가 흘러가는 구나. 외삼촌도 처음부터 외삼촌이 아니었으며, 우리엄마도 외할머니도 다 처음부터 엄마 외할머니는 아니었구나.
세월이 이런거구나...
3.
외할머니에게 2년 전쯤부터 치매증상이 나타났고, 이후 약을 복용하셔서 증상이 심해지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의 자식들은 외할머니 앞에서 치매노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과는 다르게 외할머니를 대했다. 외할머니에게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이야기 하고, 외할머니가 틀린 말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를 속이려 들었다.
외할머니와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졌다.
특히 우리 엄마는 틀니를 뺀 할머니의 모습을 우습다며 웃었고, 치매노인으로 타박하곤 해서 내게는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자꾸 외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말한답시고는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가는 길 외할머니는 날이 좋아 좋다고 하셨고
올라오는 길에는 길이 막힌다 하셨다.
할머니도 날이 좋아 좋으셨구나
운전하는 사촌누나가 그리고 운전해서 가야 할 나를 걱정하시는 구나. 하고 짐작했다.
엇그제의 하루는
지는 단풍인지 새로 드는 단풍인지 모를 가을의 산과 맑은 날씨에 나도 기분이 좋아 날씨가 좋다. 산이 예쁘다. 나무가 예쁘다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 읽은 이해인 시집 속의 어느 노인의 편지라는 시를 엄마에게 카톡으로 보내줄까 고민중이다.
어느 노인의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여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뿐인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곁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않을 테니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더 인내해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봅니다
이해인(2008). "어느 노인의 편지", 『작은기쁨』, 열림원.